복음서를 읽다보면 정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일까?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방인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부분, 예루살렘 입성후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는 부분,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에서 일곱번이나 "화"를 선언하시는 부분 등...
마태복음 첫번째 설교묶음인 산상수훈에서 8복을 선언하셨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마지막 설교묶음인 23~25장은 7화선언으로 시작하셨거든요. 사람을 해친 강도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예수님께서 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겐 그렇게 혹독하게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건 아닐까요? 분명 이 본문은 논쟁중에 나온 설교가 아니라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거든요.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 본문이지만 1.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셨을까? 2. 이 말씀을 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3. 그렇다면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과 낮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가지 질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 눈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영상을 클릭해보세요. ^^
영상: http://youtu.be/ecFBb5y85lI
pptx: https://www.box.com/s/lsc97gplyc46guzr4acj
2012. 9. 2 한올교회 주일오전 성경이야기(60) 낮은 자리
마태복음 23: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1. oops! 평형을 뒤집어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낮은 자리”입니다. 여러분 이 제목만 보고 오늘 말씀의 주제를 맞춰보세요. ^^ 제목만 봐도 대충 무슨 이야기할지 아시겠죠? ^^ 낮아져라. 섬겨라. 모 이런 이야기일거 아니에요. 예 맞아요. 그럼 반대로 높은 자리는 무엇일까요? 높은 자리 말 그대로 높이에 있는 자리, 인정받고, 1등이 앉는 자리, 섬김의 반대니까 섬김을 받는 자리죠? 그럼 그런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누굴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예 좀 전에 읽은 마태복음 23:2절에 나온 사람들이요.
마태복음 23: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예 그럼 이야기는 정리가 되었네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그런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섬기는 자리에 있어라! 예 맞아요. 그런 이야기에요. 예 이제 할 이야기 다 했고, 다 이해하셨으니까 말씀을 마칠까요? ^^ 우와 많이 좋아하시는데요? ^^
그런데... 전 설교를 계속 할 거예요. 주제를 아는데 왜 이야기하냐구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說敎(설교)란 가르침을 말하는 거구요. 가르치다라는 뜻을 찾아보니 ③ 상대방이 아직 모르는 일을 알도록 일러 주다 라는 뜻이더라구요. 아직 모르는 일을 알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가르침이라면 이미 아는 사람에겐 할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도, 학원에서 배웠거나 배울 것이기 때문이잖아요. 아니 꼭 그렇진 않네요. 학원에 안 다녀도 안 듣던데요? 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일단 예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럼 궁금해지겠죠?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무슨 말씀인지 알았다면 두 번째 내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지?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내게 말씀해주시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또 이런 것도 궁금해하자구요. 높은 자리에 서려는 것이 무엇이고, 왜 낮은 자리,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고, 낮은 자리에 간다는 것은 왜 좋은 것일까? 왜냐면... 지금 우리 사회는 높아지래요? 낮아지래요? 그럼 학교에서는 높아지래요? 낮아지래요? 그럼 우리 가정에선 높아지래요? 낮아지래요? 그럼 예수님은 높아지래요? 낮아지래요? ^^ 예 궁금해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죠?
그런 하나씩 해결해봅시다. 우선 성경이야기 60번째 시간이잖아요. 지난 시간 이야기 나눠볼께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후 성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으로 선포하셨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그러자 지도자들이 와서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는지 물었다. 예수님은 그들과 논쟁하시면서 세가지 비유, 아들에게 거절당한 아버지와, 농부들에게 거절당한 포도원 주인,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아들의 결혼잔치를 베푼 왕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은 이 세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일할 자리를 주시고, 잔치에 초대한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다.
정리되셨죠? ^^ 세가지 비유가 담겨진 21,22장은 제사장, 바리새파, 사두개인 등 당시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담겨져 있어요. 이 논쟁은 22:46을 보면
마태복음 22:46 그러자 아무도 예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2. ugh! 모순을 분석하라
예수님의 완승으로 끝나요. 그리고 이 논쟁 후엔 더 이상 다툼없이 23장부터 25장까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설교들을 날자에 구분없이 연결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부터 성전정화를 하실 때도, 그리고 21,22장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하실 때도 그리고 23~25장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계셨던 거예요. 꼭 5~7장에 산상수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신 것처럼요. 기억하시죠? 산상수훈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로 시작하는 8복으로 시작하는 바로 그 설교요. 그런데 오늘 전체 본문이 되는 23장은 모두 산상수훈과는 정 반대로 복이 있다가 아니라 화가 있다!라는 말씀이 일곱 번이나 반복이 되요. 도대체 무엇이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화를 저주를 선언케 할만큼 분노케 한 걸까요?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16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25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2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29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산상수훈에서 8복선언은 가난한 사람, 울고 있는 사람, 온유한 사람, 등 우리 모두를 이야기하셨는데 화를 선언하신 거예요. 그것도 율법학자들이랑 바리새판 사람들에게만 일곱 번이나요. 그들의 특징? 예 앞에 읽은 2절처럼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구요. 본문으로 읽은 3절처럼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4절에 보면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리고 5절을 보면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남에게 보이려고 옷술을 길게 하고 이마와 오른손에 이런 걸 차고 다녀요. 이게 경문 곽이에요. 그리고 6~10절에 보면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 아버지라고 부리는 것을 좋아해요. 여기서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를 뜻하는게 아니라 랍비보다 더 존경하는 분, 정말 존경하는 분에게 아버지같은 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뜻에서 아버지에요. 그리고 지도자라고 불리길 좋아해요.
3. aha! 실마리를 드러내라
여러분 혹시 지금까지 성경말씀 중에 내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이었나요? 아니면 혹시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생각나시나요?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설교하는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에요. 마태복음 23장을 시작하는 1절을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23: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무리는 예수님께서 장사치들을 쫓아내신 성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을 말하구요. 제자는 예수님과 몇 년째 동행하며, 예수님께 배우고 있는 사람들을 뜻해요. 예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몇 년간 귀기울여 들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분명 우리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속성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은 맞아요. 이게 우리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에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죠? 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조심하라.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다시 반복해요.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로 보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에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이었어요.
이제 두 번째 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을 해야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신 이유는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믿음의 역할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지도자이기 때문이에요.우리는 위에 있는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배워요. 자녀는 부모에게 배우고, 학생은 선생님에게 배워요. 그리고 후배는 선배에게 배우죠. 교회에선 새신자는 인도자에게 배우고, 일반성도는 집사님을 보고, 집사님은 권사님을 보고 배워요. 우린 아직 시무장로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우리교회에서 시무장로님을 세운다면 예 가장 모범이 되는 분으로 세워야 해요.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무리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요즘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To see is to get. 이라는 강영우 박사님께서 해주신 미국속담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든요. 예 보는 대로 얻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에게 무엇을 봐야하는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왜요? 말은 하지 않지만 제자들도 무리들도 모두 높아지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세상이 보는 높아지는 길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유명해지고, 주목받는 거요. 이번에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200만명이 신청을 했데요. 우리나라 인구의 4~5%가 가수를 꿈꾼다는 이야기잖아요. 사람들은 TV등을 통해 잘 알려진 사람처럼 되고 싶어해요. 축구의 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선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축구를 하려고 한데요. 유일한 성공의 길처럼 여겨진다고 하더라구요. 가수도 그런 것 같아요. 예... 모두가 위로 위로 높아지려고만 해요. 인정 받으려고 해요.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할모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럼 세 번째 질문 높아지는 것은 무엇인고 낮아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어요.
4. Whee 복음을 경험하라
23: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본문이었죠? 높아지는 건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거구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말씀을 행하고 지키는 거에요. 그런데 왜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게 높아지려는 걸까요? 말하고 행하지 않았으면 겸손해져요.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니까요. 그런데 높은 자리에 서다보면 다른 사람의 부족함만 보게 되요. 그리고 가르치고 판단하고 혼내죠.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럼 자신이 못하는 건 어떻게 하냐구요?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높아지는 사람은 자기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워요. 내가 못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미뤄요. 학교에서도 보면 선생님이 반장에게 귀찮고 힘든 일을 맡기는 경우가 있어요. 아이들을 참여시키고 동원하고 격려하는 일, 수업시간엔 조용히 시키고 필요한 것들을 제 시간에 가져오게 하는 것... 그런데 아시죠? ... 그게 제일 힘든 일이에요. 높아지는 사람은 일을 시키고, 낮아지는 사람은 그 짐을 함께 져요. 그래서 보이려고 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앉아요. 그리고 랍비라고도, 아버지라고도, 지도자라고 불리려고 하지 않아요. 왜냐면 우리의 선생님도 아버지도 우리를 이끄시는 분도 단 한분... 하나님 한분 뿐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왜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의 선생님이시고, 우리의 리더시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에요.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너무너무 잘 아는 ... 예 벌써 말씀카드를 보셨다면 여러분이 예상하셨을 답이에요. 그죠? 그런데... 정말 정말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길 원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누구를 비판하지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요. 사랑의 역할, 섬기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요.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당신의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이 모습이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어요. 복음서에 보면 여러 말씀들이 나오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람들과 함께 사셨어요. 함께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하고 고쳐주고 그렇게 사셨어요. 그리고 언제나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이 하셨어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옆에서 도우면 되었어요. 병을 고쳐주시고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전하셨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어요. 조용히, 비판하지 아니하고...
어? 그런데 오늘 나온 마태복음 23장은 비판이 아닌가요?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건가요? 아니면 뒷담화 하신건가요? 아니요 슬퍼하신거예요.
“화가 있다”로 번역된 말을 헬라어로 보면 ουαι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슬픔의 탄성이에요. 영어 번역인 woe to는 ~에게 화가 있다로도 번역이 되지만 woe의 기본적인 뜻은 비애, 비통, 슬픔 고뇌를 뜻해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기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한탄하고 계신거예요. 슬퍼하고 계신거예요. 우리가 숨긴 것까지도 다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잊고, 사랑의 하나님은 잊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아프셨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의 마지막은 눈물의 탄식으로 끝나요.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5. Yeah 결과를 예견하라.
예수님의 탄식소리가 들리시나요? 그 아픈 마음이 느껴지시죠? ㅠㅜ 여러분 예... 오늘 말씀은 처음 이야기한 대로 다 아시는 이야기를 했어요. 특별히 어떤 인물을 소개하지도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이야기, 다른 사람의 짐을 지어주고, 어떤 이름을 얻으려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 아시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알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해야하는 일과 살아가야하는 방법을 정말 아는 걸까요? 예... 구체적인 본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예수님처럼 여러분 모두의 친구가 여러분 모두의 아픔을 다 같이 지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ㅠㅜ 그런데요... 그렇게 부족한 제가 자신있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있어요. 예수님은 아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제게도 항상 똑같이 말씀해주세요. “알아” “성재야 알아” “네가 모르는 것까지 알아”
그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요.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섬겨주고 계셨음을 보게되요. 모든 상황,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저에게 말걸어 오셨음을 알게 되요. To see is to get. 나의 부족함을 볼 땐 죄책감만 오더라구요. 내가 받은 상처를 볼 땐 그 상처를 준 사람만 탓하게 되구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땐 원망과 미움만 생겨요.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보면 분노가 일던데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저와 함께 계신 예수님이 보였어요. 여러번 간증했던 것이지만 한번 더 들어주세요. 대학교때 학내사태가 군대에 가기 전까지 계속 있었어요. 교수님과 교수님이 서로 싸웠고, 교단과 학교가 싸웠고, 학생과 학생이 싸웠어요. 그리고 그 학생들과 나중에 성도가 될 성도들이 또 싸웠어요. 서로 분노하고 싸우는 모습만 봤어요. 어린 저도 분노가 쌓여갔어요. 원망이 쌓여갔어요. 그렇게 원망하며 기도하는데... 예 분명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흰 옷은 채찍으로 찢어지고 피가 배어나왔어요. 그리고 그 뒷모습으로 제게 말씀하셨어요. “성재야 나도 아파...” 전 예수님은 저 멀리서 이런 아픔을 그냥 지켜보고 있는 줄 알았어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시 말씀하셨어요. 나도 이 상황이 너무너무 아파... ... 그 한마디에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제 마음은 180도 바뀌었어요. 예수님이 아셔. 그리고 함께 하셔... 그럼 난 무얼 해야하지?
이번 한주 태풍이 두 개나 지나갔죠? 교회 지붕이 날아가고 힘들어하는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어요. 그리고 상처입은 아이들을 계속 상담했어요. 그리고 가족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셨어요. 나도 아파... 전 똑같이 물었어요. 제가 무얼할까요? 그런데 그저 함께하라고, 위로하라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왜요? 예수님도 2000년전 지도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것처럼 상처받은 우리를 향해서도 안타까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우리를 통해 전하기 원하시거든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아픔을 위로하기 원하시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시는 모습...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더 읽어봅시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나 홀로 높아지는 자리? 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낮은 자리...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자리... To see is to get!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내 아픔 내 상처를 보면 불평 불만밖에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물을 수 있어요.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왜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 믿으십니까? ^^이번 한주도 주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계신 낮은 자리에서 동행합시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줍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읍시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가요?” ^^ 오늘도 “보내소서” 찬양을 하고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