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12 한올교회 주일오전 성경이야기(57) 나귀를 타시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
종려주일마다 그리고 복음서를 설교할 때마다 벌써 수십번을 설교했을 본문이었습니다.
항상 똑같은 이야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일주일만에 마음이 바뀐 사람들을 보며 아픈 마음으로 설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엔 "예수님의 마음"에만 집중해봤습니다. 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셨을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어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려고 하셨던 걸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더라구요. 스가랴 9:9절에 바로 나오더라구요. ^^ 공의로운 왕, 구원을 베푸는 왕, 겸손한(온유한) 왕... 말씀을 묵상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예수님이 왜 나귀를 타셨는지 궁금하신가요? 그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신가요? ^^ 그렇다면 클릭해보셔요. ^^
영상: http://youtu.be/zCjDaaldAEs
PPTX: https://www.box.com/s/ba5085d6fbd817aeae61
2012. 8.12 한올교회 주일오전 성경이야기(57) 나귀를 타시다
마태복음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7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1. oops! 평형을 뒤집어라
드디어 올림픽이 끝나갑니다. ^^ 우리나라는 근대오종, 마라톤, 그리고 결승전에 오른 한순철 선수의 권투경기의 세경기만 남아있습니다. 아직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경기들이 남아있지만 현재 금메달 기준으론 역대 최대기록이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13개와 이미 타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다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언론만이 아니라 네티즌들도 은메달을 따도, 아니 동메달을 따도, 아니 메달을 따지 못해도 박수를 쳐주는 문화가 너무 좋습니다. 훈훈합니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만해도 금메달 후보로 여겨졌다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죄인이 오듯 귀국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터넷은 욕설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언론은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만 헌정영상을 틀어주고 실패에 대해선 침묵했었습니다. 얼마전 유행어중 하나였던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세상을 욕하면서 예 모두 그 길로 갔습니다.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러던 중에 인터넷에서 볼수록 맞는 명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마음속으로 세어주세요.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
포기하면 편하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
잘 생긴 놈은 얼굴값하고 못 생긴 놈은 꼴값한다.
동정할거면 돈으로 줘요.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대문으로 가난이 찾아오면 사람은 창문으로 도망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하다.
먼저 가는 건 순서 없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늦은 거다.
되면 한다.
남자는 애 아니면 애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원수는 회사에서 만난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할 필요는 없다.
티끌 모아봐야 티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때로 기존에 있던 명언들을 뒤짚어 놓았는데도 많은 네티즌들은 지극히 현실감있는 명언이라며 많은 댓글을 달고, 퍼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분명 성경에 쓰여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었거든요. 지난 주 말씀처럼 어렵고 힘들어도 죽음의 위협이 있어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인 마르다, 그 잔치에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린 마리아, 이 세사람의 이야기는 이 열아홉가지와는 정반대로 가는 길이었어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 세상은 이 명언 아닌 명언이 현실인 사회인가요? 아니면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발견한 우리의 선조들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명언인 사회인가요? 아니 사회를 물어보지 맙시다. 나는 여기에 써 있는 것에 동의하며 살고 있나요? 아니면 성경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가요?
2. ugh! 모순을 분석하라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이면 우하고 달려가는 많은 사람이 우리편이라는 논리죠. 오늘 성경본문은 매년 부활절 전주인 종려주일에 읽는 본문이고 이 본문을 해석할 때마다 이와 같은 군중심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본문이에요.
마태복음 21:8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인데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옷을 종려나무 가지들을 바닥에 깔고 또 흔들면서 예수님을 그들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자손, 즉 우리의 왕이 될 분이라며 노래하며 환영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예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고, 이런 찬양을 듣기 합당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종려주일 때 이 말씀을 전할 땐 웃을 수 없어어요. 왜냐면 이렇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육일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며 돌을 던지는 군중으로 바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을 땐 우하고 박수치며 환영하다가 예수님께서 힘없이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힌 모습을 보며 돌멩이를 던지는 모습이 우리같다라는 생각을 하며 아쉬워하는 설교를 매년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라고 말했었죠.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지난 대회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메달의 색깔과 상관없이 아니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방송인 김제동이 모든 메달의 무게가 같다고 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한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경기에서 졌어도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여전히 악플을 다는 글들이 한두개 보였지만 대부분 격려하는 글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을 보며 우리나라가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나라 중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한꺼번에 그것도 50년안에 이룬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는 책임있는 시민의식의 성장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들이 자주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렇게 욕할 때 자신에게도 침을 뱉는 일이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냄비근성, 뭐에요? 금방 끓고 금방 식는다는 거에요. 반짝 관심을 갖다가 놓아버린다를 뜻으로 썼었죠. 그런데 그렇게 말할 때, 자신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도 아니고 미래를 위한 자기 분석도 아니에요. 단지 불평일뿐이죠. 왜냐면 성숙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나에게만 쏟던 관심이 우리에게로 사회전체에로 넓혀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승을 하고 자신의 기쁨에만 빠져있는 사람과 우승한 후에 함께 기뻐해야할 사람들에게 큰 맞절을 하는 사람, 더 나아가서 경기에 진 사람에게 진심으로 격려하는 말을 하는 사람... 심지어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격려를 보낼 수 있는 사람... 누가 가장 성숙한 사람일까요? 예... 우리나라가 조금씩 그런 성숙한 사회가 되는 가는 것을 본 것 같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습니다.
3. aha! 실마리를 드러내라
그럼 우리나라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건 누구였을까요? 예 우리모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들이었습니다. 승부에 졌어도, 심지어 억울한 판정이었어도 국민들보다 선수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변명하지 않는 선수들, 은메달을 땄어도 동메달을 땄어도 최선을 다했다며 행복해하는 선수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 모습... 장미란 선수가 마지막 올림픽을 마치며 바벨에 키스를 하는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게 장미란 선수로부터 시작된 건지 몇일 후 중국의 허들 선수 류시앙도 예선전 첫 허들을 넘지 못하고도 끝까지 완주하고 마지막 허들에 키스를 했어요. 어제 체조경기에서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선수가 리본에 키스를 하며 울더라구요. 예... 결과가 어떻게 나와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 세상이 어떤 비판이 있을지라도 최선을 다했기에 웃는 선수들, 아쉽지만 7전 8기로 심지어 장애인등급을 받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올해만 그랬나요? 아니요. 몇 년전부터 금메달을 딴 사람들은 벌써 몇 년째 노력한 사람들을 봐달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성숙한 사람들이 먼저 그 길을 갔고 바귀지 않을 것 같던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군중들의 마음이 아니라 군중들을 바꾼 예수님의 마음이 궁금했습니다. 우선 몇주간 나눈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공개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오신 이유... 예 지난 주에 나눴었죠? 그 어떤 위협도, 어려움도 예수님의 사명,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 앞으로 몇주간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하신 일들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태우신 열정적인 말씀과 행적들을 보려고 합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죠?
그럼 오늘 장면은 어떻게 다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우선 오늘 본문말씀에서 읽은 것처럼 나귀를 가져오게 하고 나귀에 탄건 예수님의 생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귀의 주인도 예수님께서 쓰시고 돌려준다고 하자 곧 내어줍니다. 예 예수님에 대해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도 많이 소문을 들어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나귀는 예 이렇게 생겼어요. 우리는 보통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입성하는 모습을 개성장군, 혹은 전쟁에서 이긴 왕의 행렬로 많이 비유했는데... 왕은 나귀를 타지 않아요. 말을 타죠. 멋지게요. 미라클메이커라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한 에니메이션에서도 예수님께서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당시 독립군으로 알려진 열혈당 가롯유다가 말을 타고 입성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개선장군의 모습이죠. 그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었던 2,3절 다음절인 4절을 보면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다라고 나오는데 그리고 인용된 구절이 스가라 9:9절이에요.
스가랴 9: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메시야를 예언한 선지자 중 하나인 스가랴의 예언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내가 스가랴가 말한 자이다라고 드러내기 위함이었을까요? 예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다고 했죠? 예 예수님도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자신이 온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셔야 했어요. 그것이 바로 이 스가랴 말씀을 인용하는 거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아니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어떤 메시야냐면 자신들의 어려움을 이기게 해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들을 점령한 로마를 물리치고, 경제적으로 밥을 굶지 않게 해줄 왕을 기다렸어요. 예 그 안에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예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구약엔 그렇게 승리자 메시야를 예언한 부분도 있지만 이사야와 스가랴처럼 고난받는 종으로 그린 구절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어요.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이사야서 등을 잘 인용하지 않는데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기 때문이죠.
4. Whee 복음을 경험하라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부터 분명히 알려주셔야 했어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왕은 다른나라를 물리치고 오는 개선장군이 아니라 스가랴에 나오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 그리고 온순하여 나귀새끼를 타는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거예요. 공의롭다(qyDIx'). 의롭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성경에서 의롭다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 있어요. 정의롭다 올바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해요. 부모에게 의로운 자녀는? 예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녀, 종처럼 순종하는 자녀가 아니라 싫어도 부모를 사랑하고 믿기에 따르는 자녀잖아요. 여기서 공의롭다는 것도 같은 뜻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요. 앞서 바벨에 손키스를 하는 사진을 보여드렸죠? 그런데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그 전이었어요. 마지막 바벨을 들지 못한 장미란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 기도하는 모습은 4년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와 똑같았어요. 예... 정말 똑같았어요. 아니 더 행복해보였어요. 왜요? 그녀는 경기의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아주 친했기 때문이에요. 억지로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다고 하는 감사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신 하나님게 그 모든 과정과 앞으로 있을 미래를 맡기는 기도를 할 수 있었어요. 매순간 최선을 다했어요. 왜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어요. 감사하셨어요. 마지막 식탁앞에서도, 위협앞에서도, 심지어 자신을 버릴 제자들 앞에서도 그러셨어요. 이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아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도 감사해요. 기도할 수 있어요.
두 번째 구원을 베푸실([v'y:])왕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두가지로 해석이 되요. 영어로는 having salvation이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구원을 받은 혹은 구원을 이루는 두가지로 다 해석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자유하다라는 뜻도 있구요. 그러니 하나님으로 구원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고 그 구원과 자유를 베푸는 분이라는 뜻이 되요. 요즘 들어 자주 반복하는 말이 있죠? 화를 내는 게 큰 자유에요?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게 더 큰 자유에요? 불안한게 자유에요.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게 더 큰 자유에요? 예 바로 이 더 큰 자유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죠.
모두가 그랬지만 유도선수들도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냈어요. 특히 금메달을 딴 두명은 모두 자기보다 잘하는 선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체급을 높여야했던 선수들이었어요. 그리고 둘다 몸이 만신창이였어요. 의사들이 볼 때 경기를 하는 게 기적이다 할 정도의 선수들이었어요. 그 중에 김재범 선수... 항상 양손을 드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것이 무슨 행동인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더라구요. 지난 주 오후예배때 엄세호 목사님께 듣고 찾아봤었거든요.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예... 모두가 포기하라고 말하는 부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경기를 했어요. 그리고 금메달을 땄을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어요. 앞서 그런 글이 있었죠? 포기가 편하다. 예 포기가 편해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에요.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고 했죠? 아니요 끝까지 헌신하는 사람들이 얻는 행복을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어요.
5. Yeah 결과를 예견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유한 왕(ynI[;아니)... 이건 좀 새번역 성경의 번역이 조금 아쉬운데요. 억압된, 고통받은, 겸손한, 비천한, 빈궁한, 가난한이란 뜻이 있어요. 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도 나귀는 왕이 타는 동물이 아니었거든요. 가난한, 누구나 곁에 갈 수 있는 왕, 심지어 우리와 똑같이 고통받고 겸손한, 심지어 비천하고 가난하기까지 한 왕이었어요. 어제 새벽 동메달을 딴 우리나라 박종우 선수가 독도 세리머니 때문에 아직 동메달을 받지 못했어요. 우리로선 억울한 일이지만 올림픽에선 서로 갈등이 있는 의견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게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우발적인 것인지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해요. 우리로선 억울한 일이지만... 올림픽위원회로선 해야할 일이라고 해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에선 진리의 편에 서는 것도 금기시되는 경우가 있어요. ㅠㅜ 그런데 혹시 이 사진 보셨어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6개월도 안되었어요. 이 때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흑인을 상징하는 검은 장갑을 끼고 인간의 권리를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라는 배지를 달고 고기를 숙이고 고개를 숙였어요. 그런데 더 감동이었던 건 바로 이 백인 선수에요. 호주의 피터 노먼은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모르다가 사정을 알고는 달려가서 같은 배지를 달아요. 그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가난한 도축업 견습생으로 살면서 운동화를 빌려신고 달리기를 배웠다고 해요. 그런 그를 구세군 교회가 길러주었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올바른 가치관을 배웠다고 해요. 그런데 그 때문에 그는 호주육상회, 백인중심의 기성집단에게 찍혀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죠.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올림픽 영웅들을 초대할 때도 그는 초대받지 못해요. 그런데... 미국 육상대표들이 피터노먼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당시 200미터 우승자였던 마이클 존슨이 피터노먼에게 이야기하니다. “당신은 나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호주 육상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2006년 피터노먼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죽은 10월 9일을 피터 노먼의 날로 선포합니다. 그의 관을 운구하며 토미 스미스는 “피터는 뱃지를 착용하지 않았어도 됐어! 그는 미국출신이나, 흑인출신이 아니었잖아! 그는 우리와 함께 느낄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와 함께 했기에 그는 진정한 인간이었어!”
온유함, 겸손함이란... 예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선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가장 가난한 요셉의 집에 태어나, 목수로 사셨고, 어부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어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세요.
기독교인 피터 노먼이 흑인들의 아픔에 동참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공정함을 원칙으로 하는 올림픽 정신엔 위배되었어도 십자가의 정신엔 위배되지 않았어요. 아니 딱 맞았어요. 지금도 이 땅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자리에 있어요. 어떤 교회 수련회를 가나... 모든 목회자들이 와서 상처가 많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해요. 그들의 상처를 품어주는 목회자들, 선생님들, 이번주 마지막으로 갔던 수련회는 첫날, 설교를 끝나고 기도합시다라고 말하자마자... 강함 성령의 임재를 느꼈어요. 보통 둘째날이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나오곤 하는데 시작하자마 그랬어요. 몇 명의 아이들은 왕따였고, 아팠고, 부모로부터 아픔을 겪었어요. 그것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어요.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점점 다른 마음을 주셨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음이요. 둘째날은 여전히 자신의 상처에 통곡하는 아이를 일으켰어요. 자신의 상처에 통곡하느라 다른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둘째날부터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기 시작했어요. 마지막 날... 하나가 되어 기도했어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했어요. 그리고 수련회에서 일상으로 돌아간 후... 아이들에 글을 남겼어요. 한 아이는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쌓아놓기만 했었던 것 같다구요. 이젠 그 사랑을 나누겠다고 썼어요. 서로 갈등이 있고 상처가 있던 아이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교회와 병원의 공통점과 차이점 기억하시죠? 모두 아픈 사람이 와요. 그러나 교회는? 병이 나은 사람이 용기를 얻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줘요. 많은 교회 수련회가 내가 은혜받겠다고만 기도해요. 그런데 제가 경험한 건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할 때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는 거예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사람과 하나는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이죠. ^^ 그리고 우리는 올림픽에 출전한 최고의 노력을 다한 사람들로 인해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성숙할 수 있음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예... 기독교인도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사시겠습니까? 그저 세상의 시류에 따라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일꾼이 되시겠습니까?
오늘 이 예배가 끝나고 바로 여름수련회를 출발해요. 우리교회 중고청년부만 우리만의 수련회로 떠나는 건 2005년이후 처음이에요. 함께 가거나, 혹은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 못하거나 혹은 직장 때문에 학교 때문에 그리고 나이가 청년이 아니라 가지 않는 우리 모든 한올교회 성도님들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해주세요. 오늘 말씀으로 나눈 예수님,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합시다. 간절히 한마음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수련회에서 꿈 너머의 꿈을 만나고 온 이들이 어떻게 노력하는지도 계속 기도로 응원해주세요. 예수님은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을 바꿀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이니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세상을 바꿀 사람은 세상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장미란처럼 공의로운 사람, 어떤 어려움에도 편한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자유를 선택하는 김재범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 마지막으로 아픈 사람,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 사랑하기 위해 겸손하게 동참하는 피터 노먼과 같은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